예수님의 '산상수훈'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요? '제자의 덕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 핵심 내용이 이러합니다. "제자는 팔(8)복의 성품으로 옷 입고, 기독론으로 무장하여,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외치며, 이 이름 때문에 온갖 미움과 오해와 왕따와 박해를 받는 자이다(마5:3-12). 이러기에 제자는 '이땅의 소금'이며, '이세상의 빛'이다(마5:13-16). 모든 기독교인이 아니고, 소수의 '남은자들'(사1:9; 롬11:5)만이다.
이들이 '제자의 덕목'으로 옷 입혀, '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한다. 이런 '제자'는, 온갖 환란 속에서도, '히브리인 사상'을 가진 '나그네적 독수리 시각'을 가지고, 오히려 이 환란과 핍박을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구약의 히브리 선지자들(남은자들)이 이런 삶을 살았다. 이들이 하늘에서 큰상을 받았다. 신약시대 제자들도 구약시대 선지자들처럼 하늘에서 큰상을 받을 것이다"(마5:12). 이것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요구하는 '제자의 덕목' 입니다. 상당히 힘들고 까다로운 덕목입니다.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덕목이 아닙니다. 은혜로 '제자의 반열'에 들어온 선택 받은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그러기에 이 덕목을 무리(multitudes)에게 가르치지 않고, 소수 제자들에게만 가르치셨습니다(마5:1). 무리(multitudes)는, 다수의 하나님의 자녀들, 즉 명목상 히브리인(Nominal, Sunday, Baby Christians)입니다. 이들은 이 '제자의 덕목'의 요구를 소화하거나,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명목상 다수 크리스천들'의 '영의 눈'과 '영의 귀'를 둔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마13:13-15). 믿기 힘든 사실입니다. 일방적 예수님의 디자인입니다. 천국이 계층사회이기 때문입니다(마5:19,23:11; 딤후2:20-21).
또한 이들 '명목상 다수 크리스천들'에게, 이 세상 7,000년 '천국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the Kingdom of Heaven, 마13:11)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마13:13). 이 기간이 '창조목적학교' 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7가지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마13:1-52).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세상 7,000년이 '창조목적학교'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소화하지 못하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제자로 예정된 분들만 소화하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창조목적학교에서 일어나는 소화하기 힘든 다양한 일들을 '천국의 신비들'(마13:11)이라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마13:13).
한편 제자들은 오히려 이 '천국의 신비들'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신비들을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복된 자들로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마13:15). 게다가 이런 복을 가진 자는 더 풍성히 가지게 되며, 갖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라고 했습니다(마13:12). 얼마나 불공평한 예수님의 말씀인지요?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자신의 일방적인 디자인을, '천국의 신비들'(마13:11)이란 표현을 하셨나 봅니다. 분명 우리의 입장에서는 신비들(mysteries) 입니다. 우리가 수용하기 힘든 기독교의 Paradox중 하나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신비는 아니지만,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하신 가르침이었습니다. 무리(multitudes), 즉 다수 명목상 히브리인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제자들에게, 단순히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말씀하셨다"(마5:2)라고 마태가 기록했습니다. '가르치심'에 방점이 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였나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할 무렵, 아주 초창기 이었습니다. 이들이 아직 공식적으로 제자로 선정(마10:2-4) 되기 이전 이었습니다. 전혀 제자로 준비되거나, 생각도 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제자로 선정될 것을 꿈도 꾸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이런 준비되거나 꿈도 꾸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실천하기 매우 힘든, 그 유명한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마5-7)을 '가르치며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의 표현이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그는 예수님이 단순히 '말씀하셨다'라고 하지 않고, '가르치며 말씀하셨다'(마5:2)라고 했습니다. '가르치시려는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이이로니(irony)하게도, 당시 이들은 이 어려운 '산상수훈'을 배우려는 의욕이나 동기도 없었던 단순한 분들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을 담을 그릇도 준비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이들에게 그 어려운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들이 소화하지 못할 것을 예지(foreknew) 하셨습니다. 장차 때가 되어, 이것을 담을 수 있는 충분한 분량(measure, 롬12:3-8)이 될 때, 어느 정도 소화할 것도 예지하셨습니다. 이런 배경과 상황 가운데 '산상수훈'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마태가 사용한 '가르치다'의 동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 동사에 6가지 시제(tense)가 있습니다. 1. 현재(present), 2. 미완료(imperfect), 3. 미래(future), 4. 부정과거(aorist), 5. 완료(perfect), 6. 과거완료(pluperfect) 입니다. 이중 마태는 '가르치다'의 동사를 '미완료'(imperfect)로 표현했습니다. '가르치다'의 헬라어 현재형이 'didasko'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미완료형'인 'edidasken'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왜 '미완료형 동사'인가요? 제 생각으로는, "성령님이 마태에게 감동주시어, 제자들이 장차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할 것을 예지케 했습니다. 이들이 이 세상 창조목적학교에서, 히브리인적 나그네로 살 것도(히11:13; 벧전2:11) 예지케 했습니다. 이들이 나그네로 있으면서, 산상수훈 가르침대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영적 가난함을 고백하며 애통할 것(마5:3-4)도 예지케 하셨습니다. 이들이 온전(perfect)을 이루지 못한 채(미완료형 동사, imperfect), 본향인 주님 나라에(히11:14-16) 귀환할 것을 미리 예지케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미완료형 동사' edidasken을 사용하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리 제자라도, 산상수훈 가르침대로 100% 살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암시적 가르침입니다. 죽을 때에도 '산상수훈'을 완료하지 못하고(imperfect), 주님께 간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 받았지만, 하늘에 계신 성부하나님 같이 온전해(perfect) 질 수 없다는 예시적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이렇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perfect)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be perfect, 마5:48). 아무리 제자라도 온전해질 수 없다는 역설적 가르침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과 은혜 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롬3:24).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닙니다(딛3:5).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마태에게 '미완료 시제 동사' edidasken을 사용케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일 설교에서 "구약에서 보여주는 세(3) 부류의 히브리인들"(삼상4:6; 출32:33; 사1:9)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1. 다수의 명목상 히브리인들, 2. 소수의 멸망 받는 히브리인들, 3. 소수의 남은자 히브리인들 입니다. 이 세(3) 구룹이 같은 히브리인들이지만, '창조목적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다수의 '명목상 히브리인들'의 '창조목적관'이 어떠한가요? 다수(기독교인의 70-80%)로 구성되어있는 '명목상 히브리인들'(Nominal Hebrews), 즉 Sunday Christians, Baby Christians, 고전3:1)의 '창조목적관'이 어떠했습니까? 이들이 창조목적(사43:7,21;고전10:31;계4:11)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였습니다. 창조목적학교 교장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도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였습니다. '창조목적학교 교훈'(창조목적을 배우고, 공부하고, 가르치자)에도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였습니다. '수직계명'(Vertical Commandments, 출20:3-11; 마22:37-38)과 '수평계명'(Horizonal Commandments, 출20:12-17; 마22:39) 뿐만 아니라, '지상사명'(The Great Commission, 마28:19-20; 행1:8)에도 무지하거나 무관심했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신약의 명목상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예표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두번째 '소수의 멸망 받는 히브리인'이란 누구인가요? 창조목적을 '아주 심하게 거역한 자들'입니다. 황금 송아지(애굽의 APIS신)를 만들어 아주 심하게 창조목적을 위배하여 죽임 당했던 삼천여 명이었습니다(출32:28). 생명 책에서 이름이 지워진 자들입니다(출32:32-33). 또한 히브리인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변질되어 창조목적을 위배했던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왕상18:19)도 이 구룹에 포함됩니다.
또한 세번째 소수의 '남은자 히브리인들'의 '창조목적관'은 어떠한가요? 창조목적에 충실하며, 교장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며, 학교 교훈에 충실한 우수 학생들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팔복을 실천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독수리 시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소수 남은 자들입니다. 산상수훈대로 살려고 노력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미완료형 가르침 동사' edidasken에 속한 자들입니다. 천국 갈 때까지 마음의 가난으로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이 '남은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자신의 '미완료된 제자의 덕목으로 애통해' 하면서도, 주변에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넘쳐 있습니다. 또한 주변의 '명목상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감으로 무거운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이들을 격려해 주며, 성장시켜 주며, 보호해 주며, 위로해 주며, 천국 소망을 불어넣어 주며, 잠에서 깨워주며, 눈뜨도록 도와주며, 바른길로 인도해주며, 시대분별력을 고취해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둡니다. 이들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초점을 여기에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명자들이 '미완료형 가르침 동사' edidasken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서 이런 사명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잘나서 이 사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미완료형, 온전치 못한, 부족한 자들입니다. 산상수훈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했듯이, '산상수훈 미완료자들'(imperfect)이지만,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강권적인 이끌림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이 사명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힘이나 내 지식이나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욕심이나 내 비전 성취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 동역자(창1:28)로, 오직 하나님의 뜻 성취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입니다. 진정 이시대의 복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기쁨으로, 소원을 가지고, 주저 없이 이런 복된 자 반열에 들어 오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황 용 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