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교 주제가 "왜 산상수훈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가?"(눅5:1-11)입니다. 이는 네(4) 명의 제자들이 산상수훈을 받았는데, 그 반응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두(2) 반응입니다. '순종적 반응'과 '비순종적 반응'입니다. 안드레는 '순종적 반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비순종적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왜 다른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합니다.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상당히 충격적이며, 감당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이 네(4) 분들에게 하신 명령이 이러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해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아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의식주를 걱정 말라.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직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마6:19-34).
이 명령을 주신 때가 언제인가요? 아직 공식적으로 제자로 선택(마10:2-4) 하시기 전입니다. 어부로 생계를 유지하며, 가족을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청천병력 같은 명령입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상황에 맞지 않는 일방적 명령입니다. 이분들의 관심 밖의 명령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명령입니다. 아니, 이 네(4) 분이 제자 되겠다고 애원하지도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 앞에 이런 일방적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명령에 관심을 두고 '순종적 반응'을 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안드레'입니다. 그는 이 명령을 액면 그대로 받고, 즉시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영위하던 어업을 그만두고, 부모와 가족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한 주인(예수님)만 섬기기로 결단했습니다. 가족의 의식주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황 목사님, 어떻게 '안드레'가 이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있나요? 저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사복음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적 대답입니다. 이는 그가 이미 모태에 형성되기 전(렘1:5; 갈1:15), 하나님의 은혜로 '독수리 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선택(롬8:29-30) 받은 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당시에는 아직 '어른 독수리'는 아니고, '갓 태어난 아기 독수리' 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가 이 예수님의 명령을 '아기 독수리' 였지만, '독수리적 시각'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온전치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으로, 희미하게"(고전13:9-12) 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삼(3)인방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고기잡이를 계속했던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눅5:1-11). 여기에 안드레는 없습니다. 산상수훈 이전에, 이미 예수님이 이들에게(4명),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명령하셨습니다"(마4:19-22). 그런데 '안드레'만 따르고, 삼(3)인방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산상수훈(마5-7) 후, 고기잡이하는 모습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고기잡이에 '안드레'는 없습니다(눅5:10).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에 '안드레'가 '독수리 과'라면, 삼(3)인방은 무슨 과인가요? '비독수리 과'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두더지 과', '병아리 과', '참새 과'입니다. 이들이 이 '비독수리 과'로 시작하여, 훈련 받으며 서서히 발전되어, 때가 차면 '독수리 과'로 진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나요? 이들의 삶과 사역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디자인임이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훈련시키시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불리움 받았을 때, '두더지 과'였습니다. 그가 산상수훈을 받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큰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변 가족과 어업 사업만 보는 시각 자였습니다. 이분의 시각을 업그레이드시켜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직접, 최소한 다섯(5)번의 기적을 몸소 보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는 분'이 과연 누구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예수님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다섯(5)가지의 교육 프로그램이 이러합니다. 현장 눈높이 교육 방법입니다.
(1)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십니다(마8:5-13). (2) 열병으로 죽게 된 베드로 장모님을 치유하십니다(마8:14-15). (3) 파도를 잠잠케 하십니다(마8:23-27). (4)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돼지 떼에 들어가 산비탈에 떨어져 물에 빠져 죽게 하십니다(마8:28-34). (5) 이런 기적들을 보았는데도, 이 삼(3)인방들이, 고기잡이에 몰두합니다.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명령에 아직 미흡합니다.
이들이 밤새 고기잡이했지만 허탕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평소에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들이 무척 허탈한 가운데,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이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에게(안드레는 없음) 명령하십니다. 나가서 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하십니다. 베드로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했더니, 두(2) 배에 가득 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포함한 삼(3)인방이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눅5:1-11). 이때가 바로 이들이, '두더지 시각'에서 벗어나, '병아리 시각 자'로 업그레이드 되는 순간이라 생각됩니다. 현장 눈높이 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이렇게 조금 업그레이드 됩니다.
이들이 아직 더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독수리 과'까지 업그레이드 되려면 한참 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들의 업그레이드 과정을 공부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건에 충족된 자 되려면, 최소한 '독수리 과'에 들어와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건이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 혹은 자매와 자기 생명일지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 상당히 어려운 요건입니다.
이들이 이 '독수리 과'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쓴 뿌리'를 제거하며(마5:8; 히12:15), '겸손 훈련'과 '성화 훈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8복 훈련'(마5:3-12)입니다. 이를 통해, 온전치는 못하지만 '아들 덕목 훈련'(마6:38-48)과 '사랑 덕목 훈련'(고전13:4-7)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신비'(고전2:7, 4:1), '그리스도의 신비'(엡3:4), '천국의 신비'(마13:11), '불법의 신비'(살후2:7)에 대해 step by step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그가 베드로전서, 후서(주후64)에 깨달은 일부를 기록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 (주후27), 고기잡이 기적으로 '병아리 시각 자'로 업그레이 된 후, 37년 만에 그가 어느 정도 '독수리 과'에 입문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7천년 창조목적학교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기록했습니다"(벧후3:4-9).
저의 생각입니다. 반면 안드레는 베드로처럼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예수님의 예정적 은혜로, '독수리 과'로 직접 입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상기에 언급하듯이, 긴시간 훈련 과정을 거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순교(주후65) 하기 가까운 때가 되어,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독수리 과'에 입문하여 부분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으로, 희미하게나마, 상기 신비들을 깨닫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삼(3)인방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시대 전반에 걸쳐, 자신의 제자들을 이런 방법으로 훈련시키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Chronos의 과정을 통해 step by step, 제자 후보생들을 성장시켜, kairos 때에 '독수리 과'에 입문시켜, 이들을 통해 예정하신 뜻을 이루셨으며, 앞으로도 이런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독자 모두도 이 후보생들의 반열에 들어오기를 축복합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시각적 차원'에서, 최소한 네(4)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안드레 과', (3) '3인방 과', (3) '일반제자 과', (4) '일반군중 과'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1) '독수리 시각과’, (2) '참새 시각과’, (3) '병아리 시각과', (4) '두더지 시각과' 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다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시각의 크기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가 다르게 디자인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베푸신 은혜와 은사와 믿음의 분량도 다르게 하셨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바울에게 개종(주후35) 후 22년(온갖 전도 경험, 선교 경험, 교회개척 경험, 집필 경험, 3층천방문 경험, 핍박과 살해 경험 등) 만에, 로마서를 집필 시(주후57)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우연히 운이 좋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독자들 중 이 칼럼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장차 올라갈 천국이 엄청 광대한 사회입니다. 장차 새하늘과 새땅이 회복될 때(계21-21), 우주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목적 파트너'로 디자인된 존재입니다(창1:28). 다양한 피조물들이 창조목적에 부응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며, 가이드해주며, 격려해주는 존재입니다. 이 기능을 광대하고 복잡한 천국 사회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 사회'가 아닙니다. '기능적으로 세분화된 사회'입니다. '피라밑형 사회구조'입니다. 상위 계층이 소수이며, 하위로 내려갈수록 다수인 사회입니다. 천국이 '직분 사회'임을 예수님이 천명하셨습니다(마5:19, 18:1, 23:11; 눅19:11-27). 바울도 깨달았습니다(고전15:41; 딤후2:20-21).
그러나 천국이 직분이 다르다고 해서, 계층간 갈등이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계층간 사랑하도록 디자인된 '사랑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 계층 개념과 전혀 다른 사회입니다. 서로 격려하며 섬기며 배려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자랑하지 않는, 사랑 공동체입니다(고전13:4-7). 행복 공동체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와 은사의 분량에 따라(롬12:3-8), 다양성을 인정하며, 다양성을 즐기며, 다양성 주심에 감사하며, 다양성을 존경하며, 다양성 안에서 조화(harmonize)하며, 창조목적 파트너(창1:28) 사역을 하는 행복 공동체입니다.
이 다양한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예수님(창1:6-31) 안에서, 우리가 '조화자'(harmonizer)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 마5:9)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 마5:9,45)이라 부름 받는 상위 계층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는 낙원가기 전, 이 세상(창조목적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조화자', '화평케 하는 자' 연습을 매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가정 사역, 직장 사역, 봉사 사역, 구제 사역, 가르치는 사역, 전도 사역, 선교 사역에서 입니다. 우리는 이 연습을 매일 하다가(chronos), kairos가 될 때 '저 세상'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저 세상'에 도착하자 마자, 상응하는 주어진 직분을 받고(마16:27; 계20:12), 그곳에서 이 역할을 영원히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미리 연습합시다.
황 용 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