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나 '비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입니다. 통상 우리가 원하는 '복'이 바로 '육의 복'입니다. 물질, 건강, 장수, 가정, 사업, 직장 등의 복들입니다. 종교의 배경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복들입니다. 이 복들이야 말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이 복들 없이는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이 이 '육의 복' 받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각자가,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의 절대자들에게 기도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께, 불교는 부처께, 힌두교는 크리쉬나께, 이슬람교는 마호멭께, 토속종교는 그들의 토속신들께, 신토교는 조상신들께, 샤마니즘교는 샤만께 기도합니다. 이런 신앙 형태를 '기복 신앙'이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소원을 다 성취하지 못한 채, 아쉽게도 때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기를, 인생이 허무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죽어서 어디로 가나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주이심 믿는 자들)은 믿기를, 기독교인들만 낙원으로 간다고 합니다(눅23:43). 그러나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이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종교다원주의 크리스천들'입니다(RC, WCC, 일부 WEA, FTT). 이들은 모든 종교가 같다 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믿기를, 모든 사람들(모든 종교인들)이 죽어서 낙원으로 간다고 합니다(마24:23; 딤전2:4). 이들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기독교인들 같이, 상기의 '육의 복'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 인간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육의 복'을 받은 분들이 주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 나라들이 있는 유럽과 북미주 사람들입니다. 이 지역이 바로 오늘날 '두 짐승'이 판을 치는 지역입니다. 겉으로는 이 지역이 기독교 지역 같이 보이지만, 가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가짜들('두 번째 짐승', 종교적 적그리스도, 계13:11-18)이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설치고 있습니다(RC, WCC, WEA, FTT). 대단히 혼돈스럽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분별이 어렵습니다. 이는 예수님 재림전 반드시(마24:6) 일어나야 하는, 복음의 산고(마24:8, 23-28)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중재림이 아주 가깝다는 징조 중 하나로, 이 현상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마24:3).
한편 이 유럽과 북미주가, '첫번째 짐승'(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적 적그리스도,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계13:1-10)의 본산지 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상기 '육의 복'을 다 거머쥐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라고 하지만, 가짜들입니다. 사탄을 숭배하거나, 사회주의/공산주의 무신론자들입니다. 상기 '두번째 짐승'과 한 패거리들입니다. 복음주의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함께 했다가는 소외 당하거나 배척 당하며, 쫄딱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성, 현대, LG, SK, 한화 등 대기업들이 상기 '두 짐승'의 수하에 있습니다. 이들 오너들이 비기독교인들입니다. 혹시 교회 다닌다고 해도, 가짜들입니다. 이들은 성경 말씀대로 사업하면 다 망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들이 사업 성공을 위해 자신들 종교의 신들에게 기도합니다. 심지어 '돼지 머리'에게도 절합니다. 상기의 '육의 복'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들이 이 '육의 복'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엄청 받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파라독스'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예외는 있지만(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욥), 일반적으로 이 '육의 복'을 받지 못하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7천년)이 '창조목적 학교'이며, 크리스천들이 '학생'이며, 사탄의 자녀들이 '나쁜 교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받기 위해, 잠깐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입니다(히11:13; 벧전2:11). 이들의 본향이 낙원이며(히11:16), 이들이 천국시민권을 가진 자들(빌3:20; 엡2:19) 입니다. 이 학생들에게 '육의 복'을 많이 주게 되면, 소정의 교육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쁜 교사들'이 이 '육의 복들'이 필요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명 차원'에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파라독스' 입니다.
이 '기독교의 파라독스' 때문에 갈등했던 대표적인 두(2) 사람이 있었습니다. (1) 아삽(주전1000, 다윗의 성가대장, 시73:1-28)과, (2) 욥(주전722-586 기간 때 살았던 분으로 추정, 욥21:7-13) 입니다. 먼저 아삽의 갈등을 살펴봅시다. 그가 자신의 갈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갈등 내용이 이러합니다.
"나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매일 기도하며, 선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다. 온종일 재앙만 경험한다. 재물도 늘어나지 않는다. 징벌 받은 자처럼 고통스럽다. 그런데 주변의 악인들의 모습을 보면, 실족하며 시기까지 난다. 이들이 부패하며, 압제하며, 악하게 말하며, 거만하며, 교만한 데에도 이들의 삶을 보면 '육의 복'으로 가득하다. 이들이 손을 대는 것마다 번성하며, 재물도 넘친다. 이들의 몸도 건강하다. 고난에 처하지도 않는다. 재앙을 당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들이 죽을 때에 고통도 없다.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질투가 난다. 내가 여호와께 불평도 한다. 내가 받는 재앙으로 온종일 고통스럽다."(시73:1-16). 이것이 아삽의 갈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삽의 파라독스였습니다.
이럴 때에 아삽에게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할 때, 이 사탄의 자녀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이러했습니다. "때가 되면 이들이 미끄럼 타듯 파멸(불못, 계20:11-15)로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시73:17-19). 그에게 '독수리 시각'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7천년'이 '창조목적 학교'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폐교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폐교 때에 이들이 '사명을 다하고 불못에 던져질 것'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이와 똑같은 장면을 욥에게도 보여 주셨습니다(욥21:7-13). 욥에게 '독수리 시각'이 임하였을 때였습니다.
이들이 깨달았습니다. "아하!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최소한 상기 '육의 복'이 필요하구나! 그러나 이 세상사는 주 목적이 상기 '육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구나! 이 '육의 복'은 바로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받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구나! 그리고 이들이 깨달은 것이 또 있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인데, 각자에게 주어진 '육의 복'의 '분량'(롬12:3,6)과 담는 '그릇의 재료'(딤후2:20-21)가 다르구나! 였습니다. 또 이들이 깨달았습니다. 왜 서로 다른가 였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서로 다르기 때문임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상기의 아삽과 욥이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신학적으로 정립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 입니다(롬9:6-23). 예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크리스천들의 '육의 복’의 분량을 다르게 하셨고, 그리고 이 '육의 복'을 담는 '그릇의 재료'도 다르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사명의 싸이즈'도 다르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이 그의 주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마20:15; 출33:19; 롬9:15). 아하!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서로 다른 '이 세상 복'을 가지고 있구나! 였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물질의 사명이 있기에, 물질을 주시는구나! 어떤 분들에게는 물질을 많이 주면, 오히려 사명 감당하는데 방해가 되는구나! 건강도 장수도 사명에 따라 주시는구나! 모세 시대에는 인간 수명이 70-80세였는데(시90:10), 모세는 사명 때문에 120세까지 살게 하셨구나! (신34:7)" 등을 이들이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이 '육의 복'의 '분량과 그릇의 재료와 사명의 싸이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약4:14).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떠날 때, 이 '육의 복'도 함께, 자신들을 떠나게 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아삽과 욥) 자신들에게 주어진, '육의 복의 분량과 그릇의 재료와 사명의 싸이즈'를 겸허히 수용하며 감사했습니다. 이 사상을 바울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육의 복'을 넉넉히 받지는 않았지만, 범사에 감사했습니다(살전5:18). 이에 더하여 그는 범사에 평강까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빌4:6-7).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이 '육의 복'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데에도 그가 범사에 감사했고, 평강을 누렸습니다. 독수리 시각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독수리 시각자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느니라"(고후6:9-10)라고 자랑했습니다. 그가 '육의 복'을 넉넉히 받지는 못했지만, 독수리 시각자였기에 이런 자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창조목적 학교의 우수 학생임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런 우수학생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에게 '육의 복'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허락하셨다면, 바울이 상기의 자랑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맡겨진 사역을 성실히 잘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케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초기에, 그에게 주셨던 '육의 복'의 대부분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독수리 시각'을 대신 주셨습니다(고후12:1-4).
심지어 그에게 육신의 병도 주셨습니다. 이것을 없애 달라고 그가 예수님께 세(3)번이나 간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네가 온전하게 됨이라"라고 하셨습니다(고후12:7-9). 다시 말해 그가 자만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육체의 한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고후12:7).
아니면 바울이 자만하여, 맡겨진 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전지하신 예수님'(롬11:33; 히4:13)이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런 '육신의 병'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은혜로 '독수리 시각'을 전수받았기에, 이 '육신의 병'을 감사로 받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평강을 누렸습니다. 자유를 누렸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독수리 시각자들' 입니다. 그러나 상기의 아삽이나 욥이나 바울과 같은 '독수리 시각자들'은 아닙니다. 이들은 엄청난 고난을 통해 이 독수리 시각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기 세 분 중, 이 고난 훈련 마친 욥에게, '배나 더한 육의 복'을 주셨습니다(욥42:1-17). 아삽과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욥이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방적 호의(favor)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호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육의 복' 만을 누리려고 이 세상에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육의 복'이 필요합니다.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욥에게 주셨던 '배나 더한 육의 복'(double blessings)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우리 AMI와 독자들에게 맡겨 주신 사역이 크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욥의 시대와 비교되지 않게 사역이 광대합니다. 30여개 나라들을 섬겨야 합니다.
저는 2026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셨던 약속을 묵상합니다. 그 약속이 이러합니다. "나의 제자들아, 너희가 맡겨진 추수사역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이에 순종할 때,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에게 필요한 '육의 복'을 일방적으로 내려 줄께"라는 약속입니다(마6:25-34). 이 예수님의 약속이, 2026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AMI 선교사역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는 AMI 팀들과 독자 모두에게 적용되기를 간구합니다.
황 용 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