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라오스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동역으로 힘을 받고, 열심히 라오스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전국 16개 주(Province)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입니다. 한 주(Province)에서 3명씩 차출되었습니다. 3년간 신학 훈련을 시킵니다. 이미 4회를 마치고 5회째입니다. 신학 학사(Bachelor of Theology) 과정입니다. 이 학교는 라오스 공산당 정부에서 유일하게 인가한 기독교 교단(CMA, 설립자 Dr. Kampone)이 운영하는 신학교입니다.
설립자가 저를 15년전에 이 학교의 학장으로 초청하여, 함께 개교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배동환 선교사님의 도움이 많았습니다. 15년간 세미나 내용을 문서화와 영상화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국에 배포하고 있습니다. 제가 년 3회 방문하여 강의해 오다가, 이제는 년 1회만 강의합니다. 거의 현지화가 되었습니다. 저의 제자들이 교수가 되어 현지어로 강의합니다. 저는 이번에 두 짐승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는 북베트남 하노이(CMA 신학교)로 갑니다. 그곳에서도 두 짐승을 강의할 것입니다. 계속 기도로 동역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칼럼에서 제가 이런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공중재림 전에 일어날 여러 산고들 중, '복음의 산고'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모하멭, 부처, 비슈나, 공자 등)과 '거짓 선지자들'(종교 통합주의자들) 입니다. 이들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마24:5) 하고 실족(마24:10) 시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있다고 했습니다(출32:32-33; 마24:23-28). 그러므로 주의하라고 했습니다(마24:4).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중재림 전 반드시(마24:6)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디자인) 하셨습니다. 이 예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신붓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24:13) 입니다. 이 말씀을 당시 그의 제자들에게 하셨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장차 실제 공중재림 전에 살고 있을 제자들(신붓감들)을 향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독자 여러분들에게 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중요한 세(3) 단어들이 있습니다. (1) 끝까지, (2) 견디라, (3) 구원 받으리라(미래형) 입니다. 우리는 이 세(3) 단어들 속에 숨겨진, 예수님의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1) '끝까지'는 언제까지 일까요? 저는 세(3) 의미로 해석하려 합니다. (1) 공중 재림까지, (2) 지상 재림까지, (3) 창조목적 학교 폐교까지(심판까지) 입니다. 이중 저는 편의상 (1) 공중 재림까지로 해석하려 합니다.
이 해석에 따라, (3) '구원 받으리라’를, 이렇게 해석하려 합니다. 두(2)가지 차원에서 입니다. 그 첫번째 차원이 (1) 1세기 당시 제자들을 향한 해석입니다. 이들이 죽어서 낙원으로 올라 갑니다. 장차 예수님 공중 재림시,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서 내려올 것입니다(살전4:14-16). 이것을 예수님이 이들을 향한 구원이라 표현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이 바로 장차 (2) 공중재림 전에 살고 있을 신붓감들입니다. 이것이 두번째 차원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향한 구원 표현이 두번째 해석입니다. 이들이 들림 받아 공중에서, 예수님과 그리고 그와 함께 내려온 제자들과 만날 것입니다(살전4:17). 이 만남을 예수님이 구원이라 표현하셨다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언급하신 '구원'에, 상기 두(2)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팀 모두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계19:7-10).
문제는 '견디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들림 받는 신붓감들'이 되려면, 상기의 산고들을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 '견디라'는 단어에서 암시해 주셨습니다. 어려울 것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이 산고들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이 '견디라'는 표현속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다음의 여섯(6) 가지로 표현됩니다. "(1) 이 산고들은 내가 디자인한 산고란다, (2) 이 산고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란다, (3) 누구의 잘잘못도 아니란다, (4) 창조목적 학교의 역기능적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란다, (5) 그러므로 힘들지만 끝까지 견디라, (6) 때가 차면(전3:1-8), 좋은 일들을 보게 될 것이란다"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음을 가지시고, 제자들에게(그리고 공중재림 전 신붓감들에게) 이 '견디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견디라'라는 헬라어 단어를 살펴봅시다. 'huphomevo' 입니다. 영어로 'endure' 입니다. 이 단어를 예수님이 두 번 사용하셨습니다(마24:13; 막4:17). 바울도 사용했습니다(롬12:12; 고전13:7; 딤후2:10,12; 히10:32, 12:2-3; 딤후2:10,12). 야고보도 사용했습니다(약1:12, 5:11). 구약에서 다윗이(시9:7, 30:5, 72:17), 솔로몬이(잠27:24), 그리고 에스겔(겔22:14)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감람산 설교에서 사용하신 '견디라'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 자신에게,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단어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성육신하시여, 33년간 직접 경험하셨던 단어입니다. 그가 신성을 비우시고, 100% 인성이 되셔서(빌2:7), 경험하셨던 단어입니다. 온갖 불편함과 자존심 상함과 고난과 아픔을 참으시며, 경험하셨던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견디라'는 표현이, 예수님에게는 예사로운 단어가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하셨던 단어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 단어를 감람산 설교에서, 제자들(그리고 공중재림 전 신붓감들)을 향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간, 온갖 불편함과 자존심 상함과 고난과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가 이것들을 견디셨습니다. 이중 대표적으로 견디신 내용이 히브리서 12: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입니다.
예수님이 막연히 견디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표 지향적 이셨습니다. 장차 낙원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받을,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미리 비전으로 보시고, 견딜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낙원으로 승천하셨습니다(주후30, 행1:10).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이 낙원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계4:9-11, 5:5-14). 아니 영원히 받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비전으로 미리 보셨습니다. 그래서 참으며 견딜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목표지향적 Visionary' 이셨습니다. 앞에 놓인 즐거움을 미리 보시고 견딜 수 있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자신의 '목표 지향적 Visionary Spirit'을, 1세기 당시 제자들과, 공중 재림 전에 살고 있는 신붓감들이 전수받도록 도전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라. 그러면 구원(예수님 공중 재림시 함께 내려옴, 들림, 혼인잔치 참여) 받으리라"(마24:13)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1세기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목표지향적 Visionary Spirit을 전수받았습니다. 이들이 이 Spirit을 가지고, 로마제국 복음화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순교했습니다. 이 중 대표적 두(2)인물들이 바로 베드로(벧전1:7)와 야고보(약1:12, 5:11) 입니다.
베드로의 비전이 이러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서 단련될지라도 없어져 버리는 금보다 훨씬 귀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공중 재림때 함께 내려와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혼인잔치 참여, 천년왕국때 통지자, 신천신지에서 통치자 되는 비전)"(벧전1:7). 베드로가 이 큰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가 이 비전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수시켰습니다. 이들이 이 비전을 가지고, 온갖 시험을 참으며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험을 견뎌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는 그가 시련을 거친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약1:12)라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야고보 자신도, 이 예수님의 Visionary Spirit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이것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수시키고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계속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욥의 인내를 따르라고 도전했습니다. 욥이 이 '즐거움의 비전'을 가지고 견딘 후, '두(2)배의 복'을 받았다고 도전했습니다(욥42:10-17). 또한 예수님의 인내도 배우라고 도전했습니다. "보라, 우리는 견디어 내는 자들을 복 있는 자들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또 주의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인정이 심히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라"(약5:11). 이렇게 욥과 예수님이 'Visionary'셨다라는 사실을 야고보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도전시켰습니다.
바울도 이들처럼 비전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의 삶의 모델'(빌2:5-11)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목표 지향적 Visionary Model' 입니다. 그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 비전을 전수시켰습니다(딤후2:3,10). 로마 선교사로 파송한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 비전을 전수시켰습니다(롬12:12, 16:1-20). 황 목사도, AMI 팀들과 독자들 모두에게, 이 비전을 전수시켜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을 전수받으면,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12:2).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이 무엇인지요? 이는 '들림'이며(살전4:17), 공중 혼인 잔치이며(계19:7-10), 천년왕국에서의 통치자 반열에 들어가는 것과(계20:4,6), 신천신지에서의 통치자 반열에 들어가는 것(계21:24, 22:5)입니다. AMI 팀과 독자들 모두가, 이 즐거움을 Vision으로 바라보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산고들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상기 말씀들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 삶에서는 잘 안됩니다.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산고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 교회, 직장, 건강, 인간관계 등)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근심 걱정이 앞섭니다. 스트레스가 떠나지 않습니다. 주변을 보면 신경질만 납니다. 감사하라고 하는데, 감사보다 불만이 앞섭니다. 그러니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견디라고 하는 황목사님의 칼럼을 읽다 보면, 갈등이 더욱 고조됩니다. 어찌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독자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알미니안적 접근 방법(나의 노력, 나의 의지)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만, 잘 안됩니다. 스트레스만 가중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방법'(롬9:6-23)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예수님께 고백하며, 예수님의 은혜(계22:21)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위하여 중보해 주십니다. 나를 조금씩 성화시켜 주시며, 조금씩 나의 시각을 업그레이드시켜 주십니다. 병아리와 참새 시각에서, 최소한 새끼 독수리 시각으로 말입니다(롬8:26-27). 이 방법이 바울이 경험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였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범사'(at any circumstances,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포함)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살전5:18). 범사에 참고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롬12:12; 고전13:7; 딤후2:10,12).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가 아닙니다. AMI 팀들과 독자들의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간구합니다.
황 용 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