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2026.06.26 07:43

황용현 칼럼 2026.6.26

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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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우리가 마태복음 6장을 공부했습니다. 이 마태복음 6장이 두(2)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공부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1) 외식자들(위선자들)의 3가지의 예배 행위들(구제/기도/금식, 마6:1-18)이며, 두번째가 (2) 재물 약속(마6:19-34)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외식자들의 잘못된 기도 행위를 가르치시면서, 또한 '진짜 기도 행위'가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마6:9-13)입니다. 이 기도를 우리가 종종 예배 시작할 때나, 또는 예배를 마칠 때에 습관적으로 하곤 합니다. 예배 순서 중 하나로 말입니다. 종종 별 의미 없이, 예배 순서의 하나로 생각하며 합니다. 가볍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이 생각처럼 그리 가벼운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몸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유일한 기도'입니다. 특별한 기도입니다.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이 담겨있는 기도입니다. '창조목적 학교의 교훈'이 담긴 기도입니다. 아주 논리적이며 조직적이며 체계적입니다. 중언부언(meaningless repetition, 의미 없는 반복, 마6:7)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의미 있는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의미 있는 기도인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기도'입니다. 그가 '의미 있게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의미 있는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5:2,9). 그리고 그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이 내용들을 기도하며 그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께 의미 있는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헬. houtos, 영, in this way, in this manner) 기도하라"(마6:9) 입니다. 다시 말해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기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과 순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첫 순서와 그 내용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헬. hagiastheto, 영. hallowed be, 명령형, 수동형)" 입니다(마6:9). 이것이 첫 순서이며 첫 고백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이름(정체성)이 거룩하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거룩하다'란 무슨 의미인가요? 이는 '피조물과 구별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과 다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별'되나요? 최소한 12가지로 구별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정체성)이 이러합니다. "'삼위자'(마28:19), '자존자'(출3:14), '영원자'(시90:2), '불변자'(단6:26), '창조자'(창1:1), '전지자'(롬8:29), '전능자'(창17:1), '무소부재자'(사6:3), '사랑자'(요3:16), '자비자'(시85:10), '은혜자'(시145:17), '공의자'(요17:25)" 등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들(정체성)을 최우선으로, 매일 매일 고백할 때 아버지께서 흡족해 하십니다.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첫번째 요건입니다. 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정체성을 경외하며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내 자신을 아버지 앞에 무릎 꿇는 기도입니다. 겸손히 내가 피조물됨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겸손히 '나의 생사화복'이 아버지의 장중에 있다(신30:15)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볼 수 없는데(요6:46), 어떻게 이분에게 기도할 수 있나요?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볼 수 있습니다(요1:18,14:7-12). 아버지는 하늘 보좌에 영광체로 계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볼 수 없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나요? 이는 예수님의 겸손하심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높이시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좌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령님도 함께 기도 받으십니다(요14:10-11).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유명 인사들이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사례가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의 대상(창12-25; 요8:56-59)이 여호와(예수님)였습니다. 모세(출3-신34)도, 여호수아(수1-24)도, 사사들(삿1-21)도, 사무엘(삼상1-삼하24)도, 한나(삼상2:1-11)도, 모든 선지자들(마23:37)도, 모두가 여호와(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유명 인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다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14:13-14, 16:23).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도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요14:10-11).

 

그런데 겸손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6:9). 이러할 때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들도, 동시에 거룩히 여김 받으십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들'이 거룩함 받으시는 그 자체가 바로, '창조 목적'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흡족해 하시는 것입니다. 행복해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이 행복을 '제자들'('하나님의 아들들', '신붓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기도하는 제자들도 행복해집니다. '아쉬레 복' 받습니다. 이것이 '창조 목적'입니다. 삼위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창조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기도이며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번째 고백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헬. eltheto e basleia sou, 영. let come your kingdom, 명령형, 마6:10) 입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이 '당신의 나라'가 무엇인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저 세상/이 세상/저 세상') 입니다. 이 중 좁은 의미로는, '이 세상 7천년 창조목적 학교'('이 세상') 입니다. 이는 이 '창조목적' 학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 세상에 개교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창조 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명령입니다.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고백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이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공부하러, 이 세상에 잠깐 방문한 '나그네/학생'(히11:13)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매일 매일 고백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잠깐 교육받고 있다가, 때가 차면(전3:1-8) 본향(히11:16)으로 귀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번째 고백을 가르치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영. Let be done your will as in heaven, and also upon the earth, 마6:10) 입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루신 뜻이 무엇인지요? 이는 '창세전 창조목적 학교 개교 프로그램'이며, 이를 위한 '예수님(교장 선생님)의 창세전 십자가 프로그램'(고전2:7; 롬16:25-26) 입니다. 다시 말해 '복/저주/복 프로그램'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학생들')에게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미 이 뜻이 창세전에 하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매일 매일 고백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번째 고백입니다.

 

이렇게 상기의 세(3) 고백이 바로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가르침)' 입니다. 이 속에 '삼위 하나님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도 담겨 있습니다. '창조목적'도 담겨 있습니다. '창조목적 학교의 개교 프로그램'과 '창세전 십자가 프로그램'과 '복/저주/복 프로그램'도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7대 신학과 5대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핵심 내용(가르침)이, 이 '주기도문'의 첫 세(3)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건성으로 가볍게 습관적으로, 이 세(3) 고백을 해왔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Ashre 복'('8복')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이 상기 세(3)개의 내용(가르침)을, 상기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순서대로 매일 매일 고백해야 합니다.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시1:2). 이런 자가 바로 '창조목적 학교'의 우수 학생들(마5:11-12; 요12:26)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열납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마22:37-39)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들(행1:5)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마5:9,45)입니다. 소금과 빛들(마5:13-16)입니다. 외식하는 위선자들(마6:2)이 아닙니다. 두 주인(마6:24)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마7:15-20)이 아닙니다. 반석 위에 집 지은 자들(마7:24)입니다. 모래 위에 집 지은 자들(마7:26)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붓감들이며, 추숫꾼들(마24:37-25:46)입니다.

 

그런데 '신붓감들'은 여기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삼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들'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3) 가지 덕목들'입니다. (1) '일용한 양식 먹기'(마6:11) 이며, (2) '성화된 성품'(마6:12) 이며, (3) '시험에 들지 않기'(마6:13) 입니다. 이들에게 이 세(3) 가지 '덕목들'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맡겨진 추수사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가르치며 외치게 하기 위해, 이 덕목들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이들이 이 덕목들을 가지고, 삼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이분들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창조목적을 성취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첫번째 '덕목'이 무엇인가요? 이것이 바로 '일용한 양식 먹기'(영. daily bread, 하루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이는 '육의 양식'만이 아닙니다. '혼의 양식'(지식, 감정, 의지, 인격, 성품)과 '영의 양식'(하나님의 말씀, 요6:35,55)도 포함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매일 매일 조금씩 주십니다. 한꺼번에 많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일 양식을 위해 걱정하지 않습니다(마6:31). 내가 필요한 줄 아십니다(마6:32).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양식 문제는 자연 공급해 주십니다(마6:31-34). '자연 공급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Ashre 복 받은 자'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니 이런 분은 '두 주인'(마6:24)을 섬기지 않습니다. 섬기지 못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첫번째 덕목인 일용한 양식 먹기' 입니다.

 

두번째 덕목입니다. '성화된 성품'입니다. 이렇게 상기의 '세 부분의 일용한 양식'을 조금씩 조금씩 먹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조금씩 성화된 성품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금씩 마음이 가난(겸손, 마5:3)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을 비평하지 않는 자신(마7:1-5)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애통하며 온유하며 말씀에 배고파 하며 성령님의 생수에 목말라 하는 자신을(마5:3-6) 발견하게 됩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Ashre 복' 받고 있는 자가 경험하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를 받으면, 자연 따라오는 성품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로운 마음'(영. merciful heart, 불쌍히 여기는 마음, 마5:7) 입니다.

 

주변의 동료 크리스천들을 자비의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마5:7). 자신을 향해 죄 지은 자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 주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마18:21-35).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분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분을 예수님이, 오히려 불쌍히 여겨 주시며, 자비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5:7). 이는 자신이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때에 받는 복입니다. 왜 이런 분에게 이런 복을 내려 주시나요? 이는 이들이 창조목적 학교에서, '추숫꾼'('신붓감', '제자') 사역을 잘 담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이 부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기도'입니다(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영. As we have forgiven our debtors),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오며(영. forgive our debts)" 입니다(마6:12).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먼저 동료 크리스천을 용서해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일반 크리스천들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추숫꾼', '제자', '신붓감') 수준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마5:38-46). 그러기에 이런 영적 수준의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받은 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시며, 용서자로 업그레이드시켜 주십니다. 화평자(마5:9)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세(3)번째 덕목'으로 이어집니다. 첫번째, 두번째를 이어서입니다. 발전적입니다. 이 '세번째 덕목'이 이러합니다. "우리를 시험(헬, peirasmos, 영. 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lead us not into temptation),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입니다(마6:13). 시험에는 두(2) 가지 있습니다. (1) peirasmos 시험(마6:13; 약1:2,12, 내가 욕심 없는데 허락한 시험)과 (2) peirazo 시험(약1:13-14, 나의 욕심에 끌려 유혹 받는 시험)입니다. 'Ashre 복' 받은 자는 욕심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peirazo 시험'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심지도 'peirasmos 시험'도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peirasmos 시험'도 받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복 받은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peirasmos 시험'도 필요 없습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시1:3). 왜 이들에게 이 형통의 복을 주시는가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들의 사명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가요? 그 사명을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주기도문' 서두의 세(3) '기도 명령'에서 입니다. 그 명령이 이러합니다. (1) '아버지 이름의 거룩성 고백 명령'과, 이어서 (2) '하나님 나라'('저세상/이세상/저세상)와 '창조목적 학교 프로그램 디자인 고백 명령'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3) '이 하나님의 뜻’('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 교육 프로그램')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고백입니다.

 

오늘날 이 '하나님의 뜻'이 '땅'('이 세상 7천년 창조목적 학교)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들'('Ashre 복 받은 자들', '추숫꾼들', '신붓감들')을 사역자들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들이 이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는데 있어, 최소한 상기 세(3) 가지의 덕목들이 필요하다고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1) '일용한 양식 먹기', (2) '성화된 성품 가지기', (3) '시험에 들지 않기' 입니다. 이 가르침이 바로 '주기도문' 가르침입니다. 후에 성경 편집자들이 결론에 다음의 말씀을 삽입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입니다. 이 삽입 말씀이 바로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 입니다. '창조목적 학교의 교훈'입니다.

 

이렇게 'Ashre 복' 받은 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주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7천년이 창조목적 학교'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학교 개교 계획'이 바로 창세전 '아버지의 뜻'(마6:10) 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하나님의 신비'라 했습니다(고전2:7, 4:1; 롬16:25-26).

 

'주기도문'을 주신 목적이 바로, 이 'Ashre 복' 받은 자들('8복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아버지의 뜻'을 매일 매일 고백하며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신비를 만방에 전하는 책임이 '하나님의 아들들'(마5:9,45)에게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이 '일용한 양식'이 필요하며, '용서의 삶'이 필요하며, 쓸데없이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같이 계절을 따라 열매 맺으며, 그의 잎사귀도 마르지 않으며, 그가 무엇을 하던지 형통(prosper) 해야 합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 권세와 존귀와 찬송과 영광 받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계4:9-11, 5:8-14).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8복'을 가르쳐 주시고, 이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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