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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14:22

황용현 칼럼 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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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31일 황용현 칼럼에서, 사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탄이 스스로 생긴 존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탄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했습니다(사45:7, 54:16). 예수님이 이 사탄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잠16:4). 이 예수님의 목적이 일시적이 아니고, 영원하다고 했습니다(시33:11).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교장, 마28:18; 요3:35)이, 사탄에게 '창조목적 학교의 교감 직분(슥3:2; 마4:10; 요12:31)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직분을 수행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루시퍼의 타락(사14:12-17; 겔28:11-19) 즉시, 그를 불못에 던지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를 아담을 타락케 하여(창3:5-6), 이 세상 7천년 '창조목적 학교'를 개교하는데 사용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교감 직분을 담당하도록, 예수님이 그에게 20여가지의 기능적 이름들을 부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사역 내용이 이 이름들 속에 담겨 있었다고 했습니다. 창조목적 학교의 폐교와 함께, 그와 그 똘마니 마귀들과 귀신들과, 사탄의 자녀들을 몽땅 영원한 '불못'으로 던지신다고 했습니다(계20:10-15, 21:8). 용도폐기 하신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 7천년 창조목적 학교'가 필요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사랑의 하나님'(요일4:16)이며, '공의의 하나님'(대하12:6)이신데, 사탄과 그 팀을, 일방적으로 용도폐기 하시고, '불못'으로 던지십니까? 예수님이 비인격적이며 불공정(unfair)하신 분처럼 보입니다. 어쨌든 이 사탄팀들 모두가, 자신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했는데 말입니다. 이들이 창조목적 학교에서 우리 학생들 교육을 위해, 수고를 많이 했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이 불공정(unfair)하신 분같이 보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답을 하십니다. "이것은 나의 주권 영역이다(롬9:6-23). 나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하나님이다(마20:15).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이다(출33:19; 롬9:15)"라고, 이 질문에 답변하셨습니다. 이 사탄 문제는 우리 피조물들이 간여할 영역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피조물인 우리 크리스천들(학생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공부하려 이 세상에 잠깐 내려온, '순례자들'('pilgrims', '학생')이며 '방문자들'(나그네들, visitors) 입니다(히11:13; 벧전2:11).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자들'이 아니다(요15:19, 17:14). 너희의 본향이 '하늘'(3층천, 낙원, 고후12:2-4))이다(히11:16). 너희는 '천국 시민권자들'이다(엡2:19; 빌3:20). '이 세상 시민권자들'이 아니다."

 

그러면 누가 '이 세상 시민권자들' 입니까? 사탄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이 '이 세상 원주민들' 입니다. 그 숫자도, 하나님 자녀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반면 우리 크리스천은 숫자가 아주 적은, '이 세상 소수민족' 입니다(마7:13-14; 눅13:23-24; 계20:11-12). 그러니 우리 크리스천은 '소수민족'으로, 이 세상에 잠깐 내려와서,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받고, 이 학교 졸업(육의 죽음) 후, 본향으로 귀환하는 학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크리스천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독수리 시각자'가 되면, 이런 시각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주전1040-970)이 바로 이 '독수리 시각자' 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풀과 꽃'으로 비유했습니다. 그의 비유가 이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먼지(dust)임을 아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날들이 풀'과 같고, '그의 번영은 들의 꽃'과 같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바람이 '꽃' 위를 지나가면, 그 번영이 자국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도 안다"(시103:14-16). 이것이 다윗이 깨달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풀과 꽃’ 사상을 다윗만 깨달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주전739-680, 사40:6-8)와 베드로(주후64, 벧전1:24)도 깨달았습니다. 이들 모두가 '독수리 시각자'가 되어,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독수리 시각자로, 겸손할 수 있었나요? 이는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기에 입니다(롬1:7; 계22:21). 이들의 이 고백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크리스천들)이 이런 겸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 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독수리 시각을 가지고,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은혜로 아주 소수만, 이런 겸손한 마음을 가질 것을 암시해 줍니다. 이들 소수가 예수님의 은혜로, 겸손해져서 이런 시각의 변화를 받을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면 어떤 시각의 변화입니까? '독수리 시각'으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에게 이 '독수리 시각'이 임했습니다. 이들에게 시각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을 핍박하며 순교까지 시킨 네로왕(주후54-68 재임)을 보는 시각의 변화였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였습니다(주후65). 그후 바울도 로마에서 네로에 의해 참수당했습니다(주후68). 그리고 네로가 자살했습니다(주후68). 분명 이 두(2) 분이 '반 네로왕' 사상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두(2) 분이, 자신들의 제자들을 향한 서신들에서, 한번도 '반 네로왕' 사상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 '두(2) 짐승'(계13:1-18)의 수하의 왕들(공산권, 힌두권, 이슬람권, 불교권)에 의해, 온갖 핍박받는 상황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두(2) 분이 '독수리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로니 하게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네로왕으로부터 핍박받고 있는)에게, '친 네로왕 적’인 느낌을 주는 사상을 언급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세자에게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례를 거역함이니, 거역하는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되리라"(주후57, 롬13:1-2) 입니다. 이때가 바로 네로왕의 크리스천들을 향한 핍박이 아주 심할 때입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친 네로적 언급' 입니다. 베드로도, 바울과 같은 언급을 하였습니다(주후64, 벧전 2:13-17). 심지어 베드로는, 자신을 1년후 죽일, 네로왕을 존경(honor)까지 하라고 했습니다(벧전2:17). 이렇게 바울과 베드로가, 자신들과 자신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순교까지 하게한 악한 왕인 '네로왕'에 대해, '친 네로적' 언급을 했다는 사실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런 언급을 할 수 있었나요? 이는 이 두(2) 분이 '독수리 시각'을 가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두더지, 병아리, 참새 시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울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네로왕'을 '하나님의 일꾼'(the minister of God, 롬13:4)이라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바울이 그를 부르기를,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a revenger to execute wrath, 롬13:4)라고 까지 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와 비슷한 언급을 여호와(예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아(주전626-586)에게도 하셨습니다. 남유대 왕국을 패망시키고 솔로몬 성전까지 무너뜨린(왕하24:18-25:26), 악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자신의 종'(my servant, 렘43:10)이라 하셨습니다. 이 언급을 예레미아가 어떻게 소화했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들 '악한 왕들'을 지칭하여, '자신의 종' 또는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라고 부르셨나요? 우리의 대답이 무엇일까요? 이 사실을 소화하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저 세상, 이 세상, 저 세상)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 세상이 7천년'이며, 이 '7천년 이 세상'이 '창조목적 학교'라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질문이 조금씩 풀리게 됩니다. 이 시각을 가지면, 이 '악한 왕들'이 창조목적 학교에서, '악한 교사 역할'을 하는 자들로 예정(디자인)되었구나 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악한 왕들'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이는 구약 역사에서 이미 예표(type, 롬5:14)로, 그림자(shadow, 히8:5)로, 모형(copy, 히8:5)으로, 상징(symbol, 히9:9)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역할인가요? 이는 '이 악한 왕들'이, 조교팀(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조목적에 불순종할 때, 교장선생님의 디자인과 허락하에, 이 '조교팀'을 혼쭐내는 역할입니다. 이들이 바로 '조교팀'을 향한 '역기능적 교육 담당자' 역할입니다. '악한 교사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각에서, 이들이 '예수님의 종들'인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애굽의 '바로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악역을 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여호와(예수님)께서 모세에게 이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예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완악(harden his heart)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노예로 있는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출애굽 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출4:21). 이 말씀대로 아홉(9)번이나 모세가 출애굽을 시도했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 졌기에, 모세가 출애굽 시도에 실패했습니다(출7:10-11:10).

 

왜 예수님이 이 '아홉(9)번 실패 프로그램'을 디자인하셨나요?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이는 구원의 절대 요건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배격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종교나 예배 행위로도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열(10)번째 기적인 '유월절 어린양'(예수님, 고전5:7)의 보혈'에 항복케 했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절대 조건이 예수님의 보혈만(요6:53-56) 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시기 위해, '아홉(9)번 실패 프로그램'과 '유월절 어린양 프로그램'을 디자인하셨던 것입니다(롬9:17).

 

이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그의 주권으로, 바로 왕을 완악하게 하여, 그를 사용하셨다고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롬9:14-19). 이렇게 바로 왕을 '예수님의 종'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인가요?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입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구원의 절대 필수요건'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악한 왕들을, '자신의 종들'로 임명하시어 사용하셔 왔습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나라에 왕들을 세우셨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왕들이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일부 왕들은 자칭 기독교인이라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거나, 명목상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자'('남은자', '신붓감 후보생')는, 이 세상에서 결코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회 구조가 이런 분을 왕으로 세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6천년'(아담 타락에서 예수님 지상재림 기간)을, 예수님의 허락과 지배하에, 사탄을 '이 세상 왕'으로 임명하여(요12:31), 그 수하에 각 나라의 왕들을 세워 다스리게 하셨기에 입니다. 다시 말해 이 '6천년 기간'이 바로, '사탄과 그 똘마니 왕들'의 통치 기간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학생들)이,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받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전 '산고 시대'에는, 사탄이 '두(2) 짐승'(계13:1-18)에게 권한을 주어, 이들이 '이 세상 왕들'을 세우게 하셨습니다(계13:1-2, 17:9-13). 이들이 세운 '이 세상 왕들'에 의해, 학생들(크리스천들)이 더 심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좌경화된 무신론적 친공산주의, 친사회주의 왕들에 의해서입니다. 이 현상이 오늘날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두(2) 나라는 특히 예수님 재림전 '추숫꾼' 나라들입니다. 예수님 '눈동자 나라' 입니다(신32:10; 시17:8; 슥2:8). 세계선교 사명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 두(2) 나라에 지난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대통령들을 세우셨습니다. 미국만 보더라도, 아이젠하우어, 트루만,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클린턴, 오바마, 바이든, 트럼프 등입니다.

 

이들 모두가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비 기독교인이거나, 종교 다원주의자들입니다. 오바마는 무슬림이며 동성애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트럼프도 명목상 기독교인으로 생각됩니다. 이들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상기 '두(2) 짐승의 암묵적 영향'하에서 당선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트럼프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이, 예수님의 허락 하에, 이 '두(2) 짐승 통치시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트럼프도 이 '두(2) 짐승'과 타협하지 않으면,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짐승'이 독자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장중에서(마28:18; 요3:35), 이런 악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두(2) 짐승'을, 오늘날 크리스천들(학생들)을 위하여, '자신의 종'과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로 임명하셨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대통령도 살펴봅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입니다. 이승만, 장면,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등입니다. 이중 개신교 출신이 이승만, 윤보선, 김영삼입니다. 제가 볼 땐 이들 세(3)분 모두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명목상 크리스천 수준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이중 카톨릭 출신이 장면, 김대중, 문재인 입니다. 이들이 직접 간접으로 예수회(Jesuit)의 수하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중 불교, 무속, 무종교 출신도 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박근혜, 아마도 윤석열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윤석열 대통령이 감옥에서 성경 읽고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윤대통령 부부가 무속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대부분 국민들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기 두(2) 나라 대통령들의 영적 상태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중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분들 중, 예수님의 신붓감 후보생(남은자) 정도의 영성을 가진 자가 있었나요? 한 분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있으면 안됩니다. 만약 있다면, 그는 단 하루도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통령 직분이, 이 '두(2) 짐승 통치 구조 속'에서 수행되고 있기에 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2) 짐승 통치시대'(예수님 지상재림까지, 계19:11-17)에는, 높은 기독교 영성을 가진 자들(신붓감 후보생들, 남은자들)이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분의 선출을 예수님이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럼프나 윤석열 대통령이 이런 영성가 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이들이 이런 영성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기는, 그래도 전임자들 보다는, 이들이 '친 복음주의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림전 추수꾼들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상기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의 명단에서 보여주듯이, 비기독교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3) 분의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이들이 '남은자' 수준의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나머지는 카톨릭, 불교, 무교, 무속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두(2) 짐승의 영향권 하에서 국정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비기독교 지도자들' 통치하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국 기독교를 급성장시키셨고, 급기야 세계 제2위 선교대국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두(2) 짐승 통치시대'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려고, 작금의 정치적 심한 산고 속에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수1:7), 마24:14 푯대를 향해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4).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 지상재림 전에, 이 '두(2) 짐승'이 출현하도록 디자인(예정)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온갖 산고들'을 일으키게 하나요?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의 재림의 임박성을 미리 알려주는 '경고등' 역할 하는 자가 바로 이 '두(2) 짐승' 이란다. 그런데 이 '경고등'이 모든 크리스천들을 향한 것이 아니란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오히려 이 '경고등'을 없애려고 하거나, 없애 달라고 기도 한단다. 이 '경고등'이 나의 재림과는 무관하다고 생각 한단다(마23:37-39). 그런데 소수의 '남은자들'('신붓감 후보생들')은, 이 '두(2) 짐승'을 나의 재림의 임박성을 미리 알려주는 '경고등'으로 믿는단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이런 삶을 산단다."

 

"(1) 이 산고들을 끝까지 잘 견디며 살고 있단다(마24:13). (2) 자신도 잠에서 깨어날 뿐더러, 주변 사람들을 잠에서 깨워주는 삶을 살고 있단다(마24:42). (3) 자신이 깨어나기 위해, 매일 매일 말씀(7대 신학과 5대 신비, 작은책, 계10:10)을 먹으며, 주변도 먹이고 있단다. 이렇게 하여 이들이 재림을 예비하고 있단다(마24:44). (4) 그리고 이들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있단다. 이 사실을 내민족과 모든 민족에게 외치고 있단다(마24:45-25:46). 이런 자가 들림 받는단다. 이런 자가 7년환난에 남겨져서 울며 이를 갈지 않을 것이란다(마24:51, 25:30). 이런 자가 되라고, 내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등'('두 짐승')을 선물로 주었단다. 머지않아 이 경고등이 곧 불못으로 던짐 받는단다(계19:20)."

 

감사하게도 우리는 오늘날, 이 '경고등'('두 짐승')이 아주 밝게 켜져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경고등'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은 이 '경고등'을 보는데도, '경고등'으로 여기지 않는 크리스천들도 많습니다. 이 세상 일들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두더지와 병아리와 참새 시각자들' 입니다. 땅에 있는 먹이감만 찾아 헤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요? 이들이 땅의 먹을 것만 찾지 말고,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도록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금에 일어나는 우리나라의 정치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각 수준에 따라 문제해결 방법이 다릅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높이 떠서 '독수리 시각자'가 되면, 머지않아 7년환난 마치고 '예수님 지상재림'(계19:11-17) 직전에, 이 '두(2) 짐승'과 그 똘마니들이 불못에 던짐 받는 장면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계19:20). 그리고 더 이상 '사탄과 그 똘마니들이 통치자/대통령으로 다스리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보게 됩니다. 6천년 마무리 때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계20:1-7)도 미리 보게 됩니다. 이 시대는 '아담 타락에서 노아 홍수 이전 시대'로의 회복 시대입니다. 채식을 하며(사65:25) 천년 장수(사65:20)로의 회복 시대입니다. '예수님 신부들의 통치 시대'입니다(계20:4,6). '크리스천 통치 시대'입니다. 각국의 왕들, 대통령들, 수상들, 장관들, 도지사들, 시장들, 군수들, 재벌들, 국회위원들, 대법관들, 재판장들, 사회 각층의 모든 지도자들 모두가 크리스천들로 구성됩니다. 이 사실을 미리 보게 됩니다. '독수리 시가자의 시각'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독수리 시각'으로 이 큰 그림을 보는 크리스천은, 작금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고들을 이 '큰 그림 속'에서 봅니다. 이 산고가 큰 그림 속의 한 부분임을 봅니다. 이 산고를 당연히 '반드시'(마24:6) 일어나야 하는 '산고들(마24:8) 중 하나'로 봅니다. '독수리 시각자'의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독수리 시각자'는, 이 '두(2) 짐승 산고들'에 의연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산고들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도 어느정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고 속에서도, '독수리 시각자'는 바울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며"(살전5:18), 매일 매일 "로마서 8:28"을 고백하며, "지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빌4:6-7)을 맛보며, 누리는 자로 은총(favor)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산고속에서, 독수리 시각자가 맛보며, 누리는 은총(favor)입니다. 독수리 시각자였던 이사야가 받았던 은총입니다(사40:31).

 

황 용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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