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가 사탄과 사탄의 자녀들에 관한 여러 주제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왜 지옥과 사탄과 사탄의 자녀들을 만드셨는가?", "사탄의 자녀들이 실제 존재하는가?", "왜 네로왕을 존경하라고 했는가?" 등입니다. 상당히 민감한 주제들이며, 어려운 주제들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요14:16)과, 이끄심(마4:1;행13:2,16:6)과, 감동하심(벧후1:21)을 받아,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롬9:6-23)에 무릎 꿇어야만 소화 할 수 있는 주제들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이 주제를 소화 할 수 없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서로 다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합니다. 인간 이성과 논리와 책임을 우선시합니다. 이들 중 대부분이(예외는 있지만), 유신론적 이성주의자들입니다. 유신론적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입니다. 유신론적 과학 우선주의자들입니다. 유신론적 종교다원주의자들입니다. 유신론적 만인구원론자들입니다. 유신론적 인간책임 우선주의자들입니다. 유신론적 이 세상 낙원추구자들입니다. 유신론적 세계평화주의자들입니다. 유신론적 번영신학 추구자들입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서로 다릅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롬1:7; 계22:21)의 분량에 따라(롬12:3-8),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1) 영적 눈감긴 자, (2) 영적 두더지 시각자, (3) 영적 병아리 시각자, (4) 영적 참새 시각자, (5) 영적 독수리 시각자로 서로 시각이 다릅니다. 목사라 해서, 선교사라 해서, 신학자라 해서 모두가 영적 독수리 시각자가 아닙니다. 이들 중, 영적 시각 분별력(고전12:10)이 전혀 없는 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들을 키워낸 신학교들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재림전 산고시대(마24-25)의 '복음의 산고 현상' 중 하나(마24:4-5, 23-28)입니다.
지난 저의 설교에서 제가, 이 세상에 두(2) 종류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와, (2) 사탄의 자녀입니다(요일3:10). 이들 중 하나님의 자녀는 아주 소수이며, 다수가 사탄의 자녀들이라 했습니다(마7:13-14; 눅13:23-24; 계20:11-12).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본래 천국시민(엡2:19; 빌3:20)입니다.
그들을 예수님(교장)이,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시키시기 위해, 잠깐 이 세상(창조목적학교)에 내려 보냈습니다. 이들을 이곳에서 학생(순례자)과 나그네(히11:13; 벧전2:11)로 교육(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받게 하셨습니다.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예수님의 때에(전3:1), 이들을 본향(히11:16)으로 귀환시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다"(요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두(2)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두(2) 부류의 인간을 언제 만드셨나요? 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 답을 할까요? 성경에 의하면, 아담 타락(창3:5-6, 주전 4114) 이후였습니다. 아담이 이 두(2) 부류의 인간의 조상이었습니다. 아담이 아벨과 가인을 낳았습니다(창4:2). 이 두(2) 아들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봅시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창4:2). 그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예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제물을 받으셨습니다(창4:4). 그가 가인에 의해 살해 되었습니다(창4:8). 그후 히브리서(주후63)는 이 아벨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 예수님의 표상'(type, 히11:4)이라 했습니다. 실제 예수님이 출애굽시(주전1,500, 출12:5), '유월절 어린양'으로 피 흘리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출12:5). 이 사실을 세례 요한(요1:29)과 바울(고전5:7)과 베드로(벧전1:19)도 재확인했습니다.
이 어린양이 "무죄하신 어린양(벧전2:22)” 이셨습니다. "흠 없는 어린양(벧전1:19)” 이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사53:7) 이셨습니다. "잡혀가는 순한 어린양"(렘11:19) 이셨습니다. 그는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저주를 몸소 담당하신 어린양"(요1:29) 이셨습니다. 이 어린양이 저주의 십자가(신21:23)를 지셨습니다. 이 저주를 실제로 지실 때, 감당하시기 너무 힘드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하셨습니다(시22:1; 마27:46).
이 '저주의 십자가 죽음'(갈3:13)은 예사로운 십자가 죽음이 아닙니다. 창세전 디자인된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하나님의 신비'(고전2:7; 롬16:25-26; 엡1:3-14)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성과 논리로는 이 신비를 소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비'(헬. musterion, 영. mystery)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신비를 성취하시기 위해, 실제 그가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주후30, 마27:35). 그리고 숨 거두시기 직전에, 기가 막힌 표현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19:30)라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창세전 신비를 디자인하신 것을, 이제 "다 이루셨다"라는, 그의 감격스러운 심정을 담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2천년 교회시대를 마무리하는 끝자락 시대(대학 졸업반 시대, 재림직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재림(계19:11-17)과 함께 교회 시대가 마무리됩니다. 그후 천년왕국 시대(사11:6-12:6, 65:17-66:13; 계20:1-7)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저 세상 영원세계인 "신천신지 시대(계21-22, 창1-2 시대 회복)가 회복됩니다.
이 신천신지 회복 때, 예수님이 자신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실 지 요한에게 미리(주후95) 보여 주셨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노라'(It is done).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계21:6). 놀랍게도 이 표현 속에서 우리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전 창조목적학교를 디자인하시고, 7천년 창조목적학교를 마치시고, 장차 신천신지에서 이 창세전 디자인이 성취된 사실을 미리 보시고, 이 감동을 노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창세전 디자인하신, 어린양에 담긴 '대속의 신비'를, 아벨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배려심이며 교육 커리큘럼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주후30, 요19:30)에서와, 신천신지(계21:6)에서, 자신의 벅찬 감정을 우리에게 노출해 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계21:6)입니다. 창조목적 교육의 절대성과 중요성이 이 '외침' 속에 담겨 있습니다. 창조목적학교의 필요성이 이 외침 속에 숨겨 있습니다.
이 창조목적학교의 교감으로, 예수님이 '사탄'(마4:1,10)을 임명하셨습니다. 그 수하에 '사탄의 자녀들'(요일3:10)이 있습니다. "가인을 사탄의 자녀들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창4:16-24). 가인을 경작자로 만드셨습니다(창4:2). 그가 경작의 열매를 여호와께 드렸습니다(창4:3). 여호와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창4:5). 가인이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가 아벨(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바친 자, 창4:2-4)을 죽였습니다(창4:8). 여호와께서 가인을 저주했습니다(창4:8).
가인이 자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죽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창4:13-15). 질문이 있습니다. 왜 가인을 죽이지 않게 보호하셨나요? 이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가인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사탄의 자녀들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아벨과 가인 사건을 달리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가, 보혈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벨이 보혈과 무관하게, 단지 '첫 태생'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 가인이 첫 열매를 바치지 않았기에,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해석은 '유신론적 인본주의적 해석'입니다. 크리스천인데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빠진 해석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그 전체가 예수님 보혈 이야기인데 말입니다(요5:39; 눅24:27, 44; 히10:7).
많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가인 시대에, 아벨과 가인 이외에,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창4:14-15). 이들은 누구일까요? 또한 가인이 결혼했는데(창4:17), 그의 아내는 어디에서 나타났나요? 이 질문에 대한 학설이 두(2) 가지가 있습니다. (1) '아담 학설'(Adamites Theory)과, (2) '아담전 학설'(Pre Adamites Theory)입니다.
먼저 '아담 학설'을 살펴봅시다. 이는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다. 그의 두(2) 아들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셋의 후손, 창5:1-32)과 사탄의 자녀들(가인의 후손, 창4:16-24)이 만들어진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아벨과 가인만 아니고, 많은 아들들과 딸들도 태어났다. 성경에 이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가인이 결혼한 여인이 바로 이중 한 여인이다."이라고 보는 학설입니다. 저는 이 '아담 학설'에 동의합니다.
한편 '아담전 학설'입니다.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따르는 학설입니다. 이를 또한 '두 아담 학설'이라 부릅니다. '아담'이란 히브리어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이 학설에 의하면, '두 아담'이 존재합니다. (1) 첫번째 아담(창1:26-27, 사탄의 자녀들)과 (2) 두번째 아담(창2:7,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의 해석이 이러합니다. (1) 첫번째 아담인 '창세기 1:26-27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아담이며, 사탄의 자녀들이다. 이들이 '두번째 아담'(창2:7)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두번째 아담'이 창조되었다(창2:7). 이 두번째 아담이 바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가인이 결혼한 여인이 바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첫번째 아담(Pre Adamites, 사탄의 자녀들)의 후손'이었다 라고 해석합니다.
문제는 이 '두 아담 학설'에 의하면, 가인이 '사탄의 자녀의 조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가인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첫번째 아담'(창1:26-27, 사탄의 자녀들)이 존재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가인이 사탄 자녀의 조상(창4:16-24)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악한 자'(사탄, 마13:19; 눅8:12; 막4:15)로부터 나왔으며(요일3:12), 멸망의 길로 가는 자(유11)로, 저주받은 자(창4:11)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아담 학설'이 설득력이 없습니다.
가인이 에덴의 동쪽 놋(Nod, 메소포타미아, 바벨로니아) 땅에 살았습니다(창4:16). 그의 아들 에녹(Enoch)도 이곳에 살았습니다. 가인이 이 도시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아들 이름을 따서 에녹성(the city of Enoch)이라 하였습니다(창4:17). 전통에 의하면, 가인과 에녹이 유명한 석공(masonry)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자유 석공'(Free Mason)의 시조로 보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자유 석공'이 예수님 재림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첫번째 짐승'(계13:1-10)이라는 사실입니다. 때가 되면 이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것입니다.
아담 타락(주전4114)부터, 노아 홍수(주전2458, 창7:11-24)까지 기간이 1656년입니다. 이 기간이 약 1천년 장수 시대였습니다(100세에 첫아들 낳음, 창5:1-32). 인구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기간 인구 숫자가 수억 가까이 되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중, 노아 홍수(물 심판)를 모면하고, 방주(들림의 예표, 마24:37-39)에 들어간 자들이 단지 8명뿐(창7:7) 이었습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기간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된 분들'은 죽어서 어디로 갔나요? 베드로에 의하면, 이들이 음부/옥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음부는 '환경이 좋은 음부'입니다. 사탄의 자녀들이 들어가는 음부(지옥, 마5:22, 16:18)가 아닙니다. 이 '환경이 좋은 음부'는, 복음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임시로 머무는 장소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품'(눅16:22)이라 하셨습니다. 이들이 이곳에서 소정의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 교육(작은 책 먹기 훈련)을 받고, 낙원으로 올려 보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간 이 '아브라함의 품'으로 내려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노아 홍수전까지 죽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벧전3:19-20, 4:6). 복음을 접하지 못한 '미전도 족속들'(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된 분들)도 이런 방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의 강의, "아브라함의 품이란 무엇인가?"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홍수전, 노아 시대의 사회상이 어떤 모습이었나요? 세(3)가지로 표현됩니다. (1) 혼합 시대였습니다(창6:1-3). (2) Nephilim 시대였습니다(창6:4). (3) 죄악이 관영했던 시대였습니다(창6:5). 혼합시대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창5:1-32)과 '사람의 딸들'(사탄의 딸들, 가인의 후손들, 창4:16-24)과 혼혈 결혼했습니다(창6:2).
이들 사이에서 nephilim들(fallen ones, 타락된 자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이들이 몸짓도 크고, 용사들이었고 유명인들이었습니다(창6:4). 사회의 지배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대단히 사악했으며, 마음의 생각도 모두 악했습니다. 여호와(여호와)를 경외(fear)하지 않았습니다(창6:5). 이들을 홍수(물의 심판)로 멸망시키기로 하였습니다(창6:13). 노아의 8식구를 제외하고 모두 '물의 심판'속에 넣었습니다(창7:7, 22-23).
이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물 심판)' 직전의 세(3) 가지 사회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목적학교의 '초등학교 중반기'(주전2458)에 일어났던 사회상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날 '대학 졸업반 직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7년환난(불의 심판) 직전 때의 사회상'으로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음의 다섯(5) 가지로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1) 예표(헬. tupos, 영. type, figure, 롬5:14)로, (2) 거울, 본보기(헬. tupos, 영. mirror, example, 고전10:6)로, (3) 모형(헬. hupodeigma, 영. copy, example, 히8:5)으로, (4) 그림자(헬. skia, 영. shadow, 히8:5)로, 그리고 (5) 비교, 상징(헬. parabole, 영. comparison, symbol)으로 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시며, 창조목적학교의 교장이신 예수님의 자상하심과, 섬세하심과, 배려하심과, 무례히 행치 않으심이 상기 다섯(5)에서 발견됩니다. 누구를 위한 배려하심 인가요? 오늘날에 살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함 인가요? 아니면 소수 '신붓감들'을 위한 배려하심 인가요? 예수님에 의하면, 소수 '신붓감들'을 위한 배려하심 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24:37-39).
오늘날 배려 받는 '신붓감들'에게 미리 명령하십니다. "내 신부들아! 오늘날이 어떤 시대이어야만 하는가? 오늘날이 반드시(마24:6), (1) 혼합 시대이어야 한단다, (2) nephilim 시대이어야 한단다, (3) 죄악이 관영하는 시대이어야 한단다. 그러므로 내 신부들아! (1) 잘 견뎌야 한단다(마24:13), (2) 깨어있어야 한단다(마24:42), (3) 재림을 준비해야 한단다(마24:45), 그리고 (4) 나의 재림을 만방에 외쳐야만 한단다(마24:45-25:46)" 라고 감람산 설교에서 미리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보여주신 큰 배려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아닙니다. 신붓감들에게 입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본의 신붓감 후보들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들에게 '노아의 홍수'(물의 심판)와 '7년환난'(불의 심판) 속에 숨겨진 예수님의 배려하심과 그분의 뜻을 정성껏 잘 나누어 드리는 일입니다.
이들이 신실한 예수님의 신부로 영성 업그레이드되도록 말입니다. 업그레이드된 이들이, 영적 자녀들을 많이 출산해야 합니다. 건강식을 먹여, 건강한 자녀로 양육시켜야 합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을, 또한 예수님의 신붓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열매 맺도록, 우리가 돕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명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께 겸손히 무릎 꿇고 이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황 용 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