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두 짐승' 공부를 하는가요? 이 공부는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과 직접 연관된 이슈가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당면한 이슈가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 문제들과 무관한 이슈들인데 말입니다. 황 목사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절박합니다. "건강 문제, 경제 문제, 자녀 문제, 관계성 문제, 사회 문제, 정치 문제, 애국 문제 등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셔야지, 엉뚱한 별관심 없는 '두 짐승' 이야기만 하십니까? 우리 사정을 잘 모르시거나, 무관심하신 것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제가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저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이 질문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상기 절박한 문제들(병아리, 참새 시각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전문가도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잘 다루는 분들이 유튜브에 상당히 많습니다. 이들로부터 문제 해결 받으세요" 라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문가들(병아리, 참새 시각적 문제 해결 전문가들)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기 문제들이 해결되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주 비관적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며, 사람들이 점점 더 영악해져 가며 이기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법이 점점 더 성행하며, 법을 지키는 자들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절대가치가 이미 무너졌으며, 상대가치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해져 가고 있나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예수님(마28:18; 요3:35)이 손을 놓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손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철저한 관리하에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관리자 예수님'이 미리 말씀(예언) 하셨습니다. "나의 재림전 징도들 중 하나로, 이 세상이 상기와 같은 '산고들'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마24:3-36). 그리고 이 '산고들'을 일으키는 주체들로, 나 예수가 '두 짐승'(계13:1-18)들을 세워 임명했단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깨우기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신붓감들)을 깨워서 준비시키고, 나의 재림을 외치게 하려 함이다(마24:37-25:46). 내가 이 '두 짐승'을 이렇게 사용할 것이고, 나의 지상재림 직전에, 이들을 불못으로 던질 것이다"(계19:20).
이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 때문에, 우리가 이 '두 짐승'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짐승' 시리즈를 공부하게 되면 우리가 많은 것을 깨닫게 되며, 주어지는 혜택도 많게 됩니다. 우리의 시각을 '독수리 시각'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줍니다. '서머나 교회(계2:8-11)'와 '빌라델피아 교회'(계3:7-13)가 될 수 있도록 은혜도 베풀어 주십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두 짐승' 시리즈의 일환으로, 바벨론 종교의 영향을 받은 '마리아 신학'과 '성인 숭배 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시각이 조금 업그레이드 받았습니다. 이어서 지난 주일에 우리가 바벨론 종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변질된 십자가 신학'에 대해서도 공부했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조금 더 업그레이드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변질된 십자가 신학'이 언제 시작되었나요? 니므롯(주전2500, 창10:8-12)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이 Tammuz의 첫 글짜 'T'(바벨론어 Tau)를 가지고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이들이 '부요, 다산, 번영, 장수,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징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에게 '복'을 상징하는 형상이었습니다. '십자가' 하면 '복'을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 종교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형상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아브라함(주전2000)도 이 십자가 영향하에 살고 있었습니다(수24:2).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형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 모세 시대(주전1500)가 왔습니다. 여호와(예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죽기 직전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새 개념을 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바벨론 종교의 십자가와 정반대되는 십자가 개념이었습니다. '복'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아니고, '저주'를 상징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상의 죽음이 '저주받는 자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신21:23).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어왔던 십자가 개념과 정반대되는 가르침입니다. 당시 사형시키는 방법이 다양했습니다. 참수, 돌로 침, 교수형, 화형, 맹수먹이, 독살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주받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죽여야 했습니다. 이렇듯 모세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십자가의 개념이 정반대('저주')가 되었습니다. '복'(바벨론 종교)의 개념에서 '저주'(유대교)의 개념으로 입니다.
이런 가운데 여호와(예수님)께서 다윗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서 저주받을 모습입니다(주전1000, 시22: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 하시나이까?" 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 보여주신 대로, 1000년후에 예수님이 실제 십자가에 달리시어, 이 신음을 그대로 하셨습니다(마27:46). 놀라운 예언(디자인)의 성취입니다(벧전2:24). 이 예언(디자인)을 성취하시기 위해, 대제사장 가야바(마26:66)와 빌라도(마27:26)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게 지시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세(3)명 있습니다. 두(2)명의 강도들(마27:38)과 예수님(마27:35) 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 보면, 많은 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단지 십자가에서 죽은 것뿐이지, 저주받기 위해 죽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 저주받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저주받으시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비명을 하게 디자인되어 있나요? 이는 그가 담당할 저주가 엄청 무겁고 감당하시기 힘든 큰 짐이었기 때문이었 습니다.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저주들을 한꺼번에 감당하시는 저주였기 때문입니다. 100% 인간이 되신 예수님(빌2:7)이 감당하시기에는 무척 부담이 되었던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렇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주받으심으로 인해(벧전2:24), 그가 '대속자'(Redeemer, 롬3:24; 갈3:13; 엡1:17)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성부님과 성령님에게는 이 칭호가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직접 인간이 되시어 이 무거운 짐을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지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부님과 성령님이, 만유를 통치하는 권한을 예수님께 부여하셨습니다(마28:18; 요3:35). 또한 성부님과 성령님이,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직접 영원히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받도록 하셨습니다(빌2:5-11; 히12:2; 계4:9-11, 5:1-14). 이렇게 예수님이 이들로부터 직접 영광 받으실 때, 성부님과 성령님도 동시에 함께 영광 받으시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창1:26; 사6:8; 마28:19; 요일5:7).
그러면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으신 목적이 무엇인가요? 이에 대한 대답이 이러합니다. "그가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저주'(육, 혼, 영 저주들)를 뒤집어쓰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아담타락 전에 받았던 '복'(육, 혼, 영 복들, 창1:26-28, 2:7)을 회복 받게 해주시기 위함 입니다. 예수님의 저주받으심으로 인해,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의 복'이 우선 회복되었습니다. 이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법적으로 이미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엡2:19; 빌3:20). 이것을 '실현된 복'(realized blessing)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직 '혼'(인격, 마음, 성품)과 '육'은 옛모습(엡4:22)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지연된 복'(delayed blessings)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창조목적 학교)에 살면서, 우리의 '혼'을 성화시키게 되어 있습니다(롬12:1-2; 갈5:22-23; 엡4:1-6:9). 우리의 '혼'의 성화 정도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우리의 계층이 설정될 것입니다(고전6:9-10; 갈5:19-23; 딤후2:20-21).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하! 예수님이 나의 저주들을 나 대신 뒤집어쓰셨구나! 아하! 십자가가 내 저주를 뒤집어쓰기 위해 만든 나무이구나! 아하! 이 십자가의 저주로, 내가 '복 받은 자(육 혼 영)가 되었구나! 아하! 내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 '복'을 항상 묵상해야 겠구나! 그러니 내가 이 대속자 예수님께 감사하며, 이분을 경외해야 되겠구나! 이런 크리스천이 바로 지식 있는 크리스천(잠1:7) 이며, 지혜 있는 크리스천(시111:10; 잠9:10) 이구나! 아하! 이런 지혜 있는 크리스천이 이 '복'(육 혼 영)을 주신 자의 위대하심을 만방에 전하는 자(마28:19-20; 행1:8) 이구나! 입니다. 그런데 이런 크리스천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보면서, 상기의 "아하! 구나"를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엡1:7; 계22:21).
바울이 이런 은혜 받은 지혜자였습니다. 그가 이 예수님의 십자를 '최고의 지식'(고전2:2)과 '최고의 자랑'(갈6:14)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제국 전역을 다니며, 이 십자가의 절대성과 위대성을, 핍박과 오해와 살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외치며 가르쳤습니다(고전1:18, 23). 바울이야 말로 진정한 은혜 받은 지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바울시대 크리스천들 중에 이 '십자가의 원수 행위'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이 빌립보서 3:18-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이 십자가를 (1) 물질복 받기 위해, (2) 건강복 받기 위해, (3) 마음의 평강 받기 위해, (4) 위험에서 보호 받기 위해(십자가 성호 그리기), (5) 장수복 받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성직자들과 교회들이 이 십자가를 자신의 과시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거룩한 성직자인양 큰 십자가를 목에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도 거룩한 장소인양 온갖 모습의 십자가로 가득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런 짓들 모두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 행위'(빌3:18)라 했습니다. 멸망 받는 행위라 했습니다(빌3:19). 언뜻 보기에는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데 말입니다. 기독교의 파라독스입니다. 이런 현상이 바울시대만이 아닙니다. 교회시대 전반에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상기의 카톨릭 교인들, 정교회 교인들, 성공회 교인들, 루터교 성직자들 모두가 '십자가 성호'(the sign of cross)를 그립니다. 그 순서가 이러합니다. 오른손으로, 이마(성부 상징)로 시작하여, 가슴과 배(예수님 상징), 그리고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성령님 상징)로 마칩니다. 이 '십자가 성호'를 모든 기도와 전례의 시작과 마칠 때, 식사 전후에, 중요한 일의 시작과 마칠 때, 어려운 일과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 그립니다. 이것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카톨릭 백과사전에 의하면, "이는 악을 쫓고 악을 멀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땅의 것만 생각하며, 자기 배를 채우는 데에만 관심있기 때문입니다"(빌3:19). 두더지와 병아리 시각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오용하는 행위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되는 행위를 합니다"(빌3:18). 상기 교단들의 성직자들과 교인들이, 이것이 비성경적인 것인 줄을 모르고, 하나의 전통과 교단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합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황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십자가의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나요? 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이 이러합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독수리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매일매일 이것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우리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다음의 일곱(7) 가지로 우리에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1) 우리는 본래 이 세상 시민이 아니고, 천국 시민이다(엡2:19; 빌3:20). 그러므로 (2)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요15:19, 17:14). 그런데 창조목적의 절대성과 중요성을 교육하시기 위해, (3) 우리를 잠깐 이 세상에 학생(순례자, 나그네, 방문자, 히11:13; 벧전2:11)으로 내려 보내셨다. (4) 우리가 이 학교를 졸업(육의 죽음)하고, 다시 본향으로 귀환한다(히11:16). (5) 그런데 우리는 창조목적 학교의 그 많은 학생들 중, 교장 선생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다. (6) 그래서 우리가 깨어서 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외쳐야 한다(마24:37-24:46). (7) 예수님이 약속하셨다. 이런 외치는 자가 바로 들림 받는 신붓감들이다.
상기의 (7) 가지의 정체성을 매일매일 고백하며 삶에 적용하는 크리스천들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의 친한 친구들' 입니다. 독수리 시각자들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찬송 149장) 찬송을 매일 부르며 감격해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감들입니다(계19:7-10). 천년왕국에서의 통치자들이며(계20:4,6), 신천 신지에서의 통치자들입니다. 신천 신지에서 새예루살렘을 드나드는 왕권 부여 받은 자들입니다(계21:24, 22:5). 우리가 두(2) 짐승 시리즈를 공부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황 용 현 목사